
그는 오지 않았다. 내가 틀린 말을 한 게 아니라 틀린 자리에서 말했던 거다.
중동에서 체류 중일 때, 나는 이웃을 저녁 식사에 초청한 일이 있었다.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몇 달 뒤 내가 그의 집 문을 두드렸을 때, 문은 망설임 없이 열렸다. 그는 차를 따라 주었고, 내가 앉을 자리를 손수 정해 주었다. 그날 나는 하나를 배웠다. 내가 틀린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틀린 자리에서 말했던 것이다.
콜린 채프먼의 『십자가와 초승달』을 다시 펼치다가 그 기억과 꼭 닮은 문장을 만났다. 무슬림을 우리 집으로 부르기보다 그의 집을 찾아가는 편이 상대를 더 편안하게 한다는 조언이다. 책 첫머리에 놓인 작은 실무 권고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 앞에서 오래 멈췄다. 이 책 전체가 그 한 줄의 확장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기 때문이다.
누구의 집에서 만나는가는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가를 정한다. 우리 집으로 부르면 자리도 음식도 시간도 우리가 정한다. 그의 집에 가면 그 전부를 그가 정한다. 손님을 맞는 일에 집안의 명예가 걸린 사회에서 이 차이는 절대 사소하지 않다.
두 벼랑 사이에 선 책
이슬람을 다루는 기독교책은 대개 두 벼랑 가운데 하나에 선다. 한쪽에는 정확하지만 끝까지 읽기 어려운 학술서가 있고, 다른 쪽에는 술술 읽히지만 사실관계가 헐거운 대중서가 있다. 채프먼은 그사이의 골짜기를 자기 자리로 골랐다. 그래서 양쪽에서 돌이 날아온다. 무함마드를 단숨에 적그리스도로 단정하는 이들에게도, 이슬람이 십자가에 실제보다 우호적인 것처럼 꾸미는 이들에게도 이 책은 불편하다.
채프먼은 영국 성공회 선교회 소속으로 이집트와 레바논에서 사역했다. 그 뒤 버밍엄의 선교사 훈련 기관인 크라우더 홀을 이끌었고, 다시 베이루트의 근동신학교로 돌아가 이슬람학을 가르쳤다. 현장에서 강단으로 갔다가 다시 현장으로 돌아간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문장에는 단정이 적다. 원리와 예외를 모두 겪은 사람의 글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순서가 곧 주장이다
신학보다 사람이 먼저 오고, 사람을 알기 전에 자기부터 들여다보라고 한다. 내 안의 두려움과 반사적 거부를 인정하라는 것이다. 두려움을 품은 채 읽으면 어떤 정보도 두려움의 재료가 된다. 같은 통계가 누군가에게는 기회로, 누군가에게는 위협으로 읽힌다. 갈림은 통계가 아니라 읽는 사람 안에 있다.
에스겔은 사로잡힌 백성에게 보내졌을 때 입을 열기 전에 7일 동안 그들 가운데 앉아 있었다(겔 3:15). 전할 말씀이 이미 그의 입에 있었는데도 먼저 앉았다. 채프먼이 말하는 '무슬림이 앉은 자리에 나도 앉아서 보기'가 바로 그 이레다. 그 시간에는 반박도 설득도 하지 않는다. 급한 사람에게는 지루한 시간이다. 그러나 이 시간을 건너뛴 사람은 그 뒤의 모든 말을 허공에 던진다.
1854년 아그라, 이긴 쪽이 남긴 것
이 책에서 가장 서늘한 이야기는 1854년 인도 아그라에 있다. 독일 출신 선교사 카를 고틀리프 판더는 이슬람의 어법으로 기독교를 변증한 『진리의 저울』을 쓴 사람이다. 그해 4월 10일과 11일, 그는 무슬림 학자 라흐마툴라 카이라나위와 공개 논쟁을 벌였다. 논쟁은 성경의 진정성 문제로 쏠렸다. 카이라나위는 훗날 서구 성서 비평의 성과를 무슬림 변증의 무기로 정리한 『진리의 현시』를 펴냈고, 그 책은 지금도 무슬림 변증가들의 서재에 꽂혀 있다. 오늘 거리에서 만나는 무슬림 청년이 "성경은 변질되었다"고 말할 때, 그 말의 뿌리 하나가 170여 년 전 그 강당에 닿아 있다. 그때 판더는 논리에서 이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남긴 것은 승리가 아니라 상대의 무기였다.
그러나 채프먼이 마음을 둔 쪽은 다른 계보다. 그 첫머리에 헨리 마틴이 있다. 신약을 우르두어와 페르시아어로 옮긴 그는 페르시아에서 무슬림 학자들과 대화했다. 그리고 귀국길에 올랐다가 1812년 역병이 돌던 토카트에서 불과 31세로 숨을 거두었다. 그 뒤를 두 사람이 잇는다. 카이로에서 30년 가까이 아랍어로 글을 쓴 템플 게어드너, 그리고 미나렛의 기도 부름을 우리를 향한 부름으로 들은 케네스 크래그이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하나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논쟁에서 이기려는 마음보다 오래 곁에 있으려는 마음이 우선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 사람은 모두 상대의 언어로 말했다. 내 언어로 말하면 상대가 애쓰고, 상대의 언어로 말하면 내가 애쓴다. 사람들은 그 수고의 방향을 정확히 알아본다. 서툰 튀르키예어로 더듬거리던 날이 유창한 영어로 말하던 날보다 대화가 더 깊이 들어갔던 것을 나는 잊지 못한다. 지금 이 땅에서도 다르지 않다. 우즈베크어 인사 한마디, 벵골어 축복 한 구절을 익혀 건네는 일은 능력이 아니라 방향의 문제다. 누가 수고할 것인가를 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꾸란 5장 82절은 믿는 이들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그리스도인을 꼽는다. 그들 가운데 교만하지 않은 사제와 수도자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슬림의 경전이 열어 둔 문의 열쇠가 교리가 아니라 태도라는 사실이 뼈아프다. 옳은 것을 쥔 손이 교만하면 문은 닫힌다.
온건함은 내용이 아니라 방법의 온건함이다
그렇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채프먼의 온건함은 내용이 아니라 방법의 온건함이다. 그는 성경 변질론에 단호하게 맞서고, 두 전통이 갈라지는 지점을 흐리지 않는다. 꾸란 4장 157절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말하고, 고린도전서 1장 18절은 십자가의 말씀이 구원받는 이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가 인용한 무슬림 학자 무함마드 하미둘라의 고백도 그 거리를 드러낸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길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성육신이었겠지만 이슬람은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이기려고 고른 인용이 아니라, 두 전통이 같은 물음 앞에서 다른 답을 내고 있음을 보여 주려고 고른 거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증언한다. 태도에서는 가깝고 내용에서는 멀다. 채프먼이 내려놓은 것은 그리스도의 유일성이 아니라, 그것을 확성기로 외치는 방식이다.
집 없는 이웃의 집이 되어
지금 나는 국내 이주 무슬림 근로자를 섬기는 교회를 담임한다. 영국의 상황이 정착의 문제라면 우리 사회는 대체로 체류의 문제다. 고용허가제로 들어온 근로자 대부분은 정해진 기간을 마치면 고국으로 돌아간다. 이 땅에서 방문이란 일터 곁 숙소를 찾아가는 일이다. 여섯 사람이 한방을 쓰는 곳이다. 그들 대부분에게는 우리를 부를 자기 집이 없다. 그러니 채프먼의 조언은 여기서 한 번 더 뒤집혀야 한다. 집이 없는 이웃에게는 우리가 그의 집이 되어 주어야 한다. 영국에서 쓰인 문장이 국내 근로자들의 일터에서 그렇게 다시 쓰인다. 그들이 고국으로 가져갈 것은 정착 프로그램의 수료증이 아니다. 낯선 땅에서 제 숙소 문을 두드려 준 한 사람의 얼굴일 것이다.
옳은 말과 도착한 말
채프먼이 오래 머문 베이루트는 내전을 겪은 도시다. 한 골목에 사는 서로 다른 종파의 이웃들이 한때 서로에게 총을 겨눴다. 그런 곳에서 오래 산 사람은 단순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짧게 다녀간 사람일수록 확신이 크고, 오래 머문 사람일수록 말이 조심스럽다. 나도 이슬람권에서 오랜 시간을 지내며 그 조심스러움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나약함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안다. 확신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확신을 건네는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무엇을 말할 것인가는 신학의 문제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말할 것인가는 사랑의 문제다. 앞의 것만 정리한 사람은 자주 옳으면서도 자주 실패한다. 잠언 25장 11절은 경우에 합당한 말이 은쟁반에 담긴 금사과 같다고 한다. 합당하다는 것은 옳다는 뜻만이 아니라 자리에 맞는다는 뜻이다. 도착하지 않은 말은 하지 않은 말과 다르지 않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율법 교사는 예수께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답 대신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시고 되물으셨다.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고. 이웃이 누구인지를 묻는 사람에게, 이웃이 되었는지를 물으신 것이다.
나는 오늘도 그날의 찻잔을 떠올린다. 내 집이었다면 그는 예의 바르게 듣기만 했을 것이다. 그의 집이었기에 그는 묻고, 반박하고, 마침내 귀를 기울였다. 그 자리에 앉고 나서야 나는 그가 무엇을 믿는지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믿는지 말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 사람의 집에 가 본 적이 있는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만약 아직 그렇지 않다면 그는 내가 전하는 복음을 그냥 건성으로 흘려보낼 가능성이 높다.

